본문 바로가기
시사

일본 아베 총리 사임과 그의 업적 (월스트리트 저널)

by 요약남 2020. 8. 28.
반응형

일본 아베 신조 총리가 금요일 사임 발표와 함께 악화된 그의 건강 상태에 대해 언급할 것이라고 일본 여당 의원이 말했다. 

세코 히로시게 의원은 차기 총리가 정해질 때까지 아베 총리가 사무실에 머무를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65살의 아베 총리는 지난 8월 17일 도쿄의 한 병원을 방문하여 7시간이 넘는 테스트를 했다. 일 주일 후 다시 병원을 찾아 다른 테스트까지 받았다. 그는 결장에 궤양 등이 생기는 궤양성 대장염이라는 자가 면역 질환을 오랫동안 겪어 왔다. 


아직 후임으로 거론 되는 사람들이 없긴 하지만 여당인 자민당의 여러 베테랑 의원들 중 하나가 총리직을 이을 것으로 보인다. 아베 총리의 정책이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정책이라 비판했던 전직 국방성 장관인 '이시바 시게루'가 여론조사에서 후임자로 가장 상위에 랭크되어 있다. 그는 2012년 자민당 총제 경선에서 패배하였으며 이후 총리직에 대한 명확한 의지를 보였다.

 

아베 지지자인 재무성 장관 아소 타로와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역시 후보에 올라와 있다. 아소와 스가 장관은 아베가 총리직을 수행하기 시작한 2012년부터 현재의 직책을 수행해 왔으며 아베의 정책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국방성의 고노타로, 전직 외무성의 기시다 후미오 역시 후보군에 올라와 있다.

 

아베 총리는 2006년 처음 총리가 되었으나 이듬해 사직했다. 당시에도 건강 문제 때문이었다. 그는 2012년 12월 26일에 총리 사무실로 돌아왔고, 일본이 19세기 말 유럽 스타일의 정부를 체택한 이후로, 일본 최장수 총리의 기록을 세웠다. 

최근 8년 동안 새로운 무기, 수륙양용 군대등을 도입하며 국방력을 강화 했으며 헌법을 고쳐 일본 군대가 일본 영토 밖에서도 활동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는 세계3위 규모의 일본 경제를 부양하고자 분투했으나, 올해 코로나 바이러스가 일본을 강타하고 2/4분기 일본의 경제 규모는 아베 총리가 2012년 총리직 수행을 시행했을 때보다 작아졌다.

 

아베 총리는 미-일 군사 동맹의 지지자였으며, 트럼프 대통령과 5번의 골프를 치고 수십번의 전화통화를 하며 친밀한 관계를 쌓았다. 그보다 이전에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원폭피격지인 히로시마에 처음으로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을 접객한 것도 아베 총리였다. 그는 미국 의회에서 첫 합동 연설을 한 일본 총리였다.

 

"역사의 기적이 아니라면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죽일듯이 싸우던 적들이 이제는 영혼으로 묶인 친구가 되었습니다." 

아베 총리가 2015년 4월 미 의회에서 한 발언이다.

 

몇 달이 지나고 그는 일본 군대가 미군과 긴밀히 협조하여 일본 영토 밖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법안을 밀어부쳤다.

 

그의 임기 후반에도 북한의 미사일 위협과 동중국해의 분쟁섬에서 중국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군사력 강화를 지속했다. 

아베 내각은 갑판이 평평한 2척의 구축함을 개조하여 전투기가 이착륙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2차 대천 이후 최초의 일본 항모가 탄생했다. F-35를 대량 구매하여 미국 다음으로 F-35 편대를 많이 가진 나라가 되었으며, 인공위성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신발 상자 크기의 목표도 정밀타격할 수 있는 크루즈 미사일도 배치했다.

 

"그가 추구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국 내외의 정치적 안정이었다"고 워싱턴 윌슨센터의 고토 시호코가 말한다.

 

그녀는 "아베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과의 관계를 도모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일본은 트럼프 대통령의 분노로 고통받지 않았다. 일본은 독일 같이 일방적인 미군 철수를 당하지 않았다. 이 것이 아베의 공로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베는 그가 가장 추구하고 싶었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총리였던 그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의 시절부터 내려오던, 1947년 받아들여야 했던 일본의 평화헌법을 수정하는 것이다. 당시 일본은 2차 대전 패전 후 미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일본이 잠재적 전쟁을 수행할 수 없으며 군대는 자국 보호를 위해서만 유지할 수 있다는 헌법 제 9조를 아베 총리는 수정하고 싶었다.


그는 또한 2차 대전후 소련에게 뺏긴 섬을 다시 찾아오지 못했다. 

 

일본 경제를 되살리려는 아베의 노력, 즉 아베노믹스는 복합적인 결과를 낳았고 임기 말에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강타를 맞았다.

 
구로다의 '바주카'식 양적 완화는 국채 형태로 매년 수천달러를 매입하고 도쿄 주식시장에서 거래되는 회사들의 주식으로 구성된 펀드를 대량 구매했다.

그 정책은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 부양을 이끌어냈고 완전고용을 달성시켰다. 아베는 선거기간에 일본 전국에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고 자랑했었다.

하지만 강력한 경제 성장은 구로다의 2% 인플레이션 목표치 만큼이나 당성하기 힘들었다.


"아베는 너무 일본 중앙 은행에 의존적이었다"고 전 일본 은행의 임원이자 게이오 대학 교수인 시라이 사유리 교수가 말한다. "표면만 보면 좋아보인다. 엔화는 낮고 주식가격은 높다. 하지만 지속가능하지가 않다. 아베는 장기적 관점이 없었다. 인구가 감소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그는 이 문제를 직시하지 않았다."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건설현장이나 노인들이 거주지역의 인력 부족현상에 대응하기 위해 국경을 열어 수십만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받아들였다. 전통적으로 이민자들을 거부하는 나라에서 펀더멘털한 변화가 생겼다.


그의 행정부도 기업의 지배구조 변화를 추진했다. 기업들을 독려하여 외국인 근로자들을 더 받아들이게 했으며 수백만의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들어왔다.

 

여당의원이자 전직 통상장관이었던 세코는 
"아베 정부의 지원 정책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고용 환경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고 봉급도 올랐다."

아베의 경제 성장 시절에는 두 번의 아픈 세금 인상이 있었다. 증세는 이전 정부의 계획이었지만 아베는 마지못해 시행할 수 밖에 없었다. 매출세율이 2014년 5%에서 8%로 증가했으며  2019년 10월 1일부터 10%까지 올랐다. 각가의 증세때마다 소비가 위축되었다. 

두번째 세율 인상으로 발생한 소비 위축에서 헤어나오고 있을 쯤 코로나 팬데믹을 맞았다. 일본이 미국이나 유럽만큼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한편에서는 코로나 확진자가 증가하는데 한편으로는 여행을 위한 보조금을 주는 일관되지 않은 방역정책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아베는 그가 수십년간 일본을 괴롭혀온 비관주의를 바꿔놓았다고 주장해 왔다. 그는 2019년 매끄러운 왕위 이양을 이끌어냈다. 이로서 아키히토 왕은 200년 만에 처음으로 왕위를 선양한 왕이 되었고 그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나루히토가 왕이 되었다.

아베 총리는

"우리는 왕위 선양과 관련된 장해물들을 완벽히 돌파했다. 우리는 세계의 중심 무대에서 빛나는 일본을 만들 것이다. 지난 7년동안 나는 나의 모든 것을 이 꿈을 향해 가는데 쏟아부었다."고 지난 1월 국회에서 연설했다.

 

출처: 월스트리트 저널 

https://www.wsj.com/articles/shinzo-abe-to-resign-as-japanese-pm-due-to-health-concerns-local-media-says-11598592532

댓글